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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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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 입고도 영생, 육체 벗고도 영생_태승철

by 태승철 · 23-02-18 10:10 · 86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육체 입고도 영생, 육체 벗고도 영생>의 줄거리 :

육체는 반드시 죽고 소멸합니다. 그런데 이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영생을 살지 못하면 육체가 소멸한 후에 살게 될 영생도 없습니다. 영생은 영생에 이어질 뿐이어서 영생만이 영생을 가져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영생을 방해하는 자들이 반드시 주변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서 만들어진 교묘한 말로 육체 입고 살 영생을 방해함으로써 육체 벗고 살 영생도 앗아갑니다.

 

육체 입고도 영생, 육체 벗고도 영생

 

(골로새서 2:1~5)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제목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도 영생을 살고, 육체를 벗고 신령한 몸을 입을 때도 영생을 이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육체가 죽어서 소멸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반드시 소멸하게 될 육체를 입고도 영생할 수 있습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영생을 살지 못하면 육체를 벗고 신령할 몸을 입게 될 영생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영생은 영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육체 입고 사는 영생에서 육체 벗고 사는 영생은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누려야 되는 영생은 궁극적인 영생의 마중물과도 같습니다. 바가지로 물을 떠서 펌프에 붓고 펌프질을 하면 지하수가 따라 올라오는 것처럼, 마중물로써의 육체 입고 사는 영생이 없으면 신령한 몸을 입게 될 영생도 있을 수 없습니다.

4차원 천국에서 신령한 몸을 입게 될 영생의 상황과 현재의 삶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 이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로서 예정하신 사람들입니다. 아들로서 예정하신 것이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의 역사는 창세 이전에 하나님의 예정하심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로 예정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영생이 약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4차원 천국에서 사는 영생이란 영인 마음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고 주체가 되고자 합니다. 지금의 상태는 몸으로 사는 것이고, 영인 마음에 육체를 씌워놓은 상태입니다. 천사들이 살고 있는 4차원 영생을 살아야 할 영에 육체를 씌워놓은 상태가 지금의 상태입니다.

육체를 씌워놓았기 때문에 영인 마음에서 4차원 세계는 가려져 있습니다. 천국과 천사들과 하나님 아버지가 가려져 계십니다. 마음과 4차원 세계와의 접촉이 끊어진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의 마음이 들어가면 육체를 뒤집어쓰고 단절되었던 4차원의 실제 사실들에 접촉과 연결이 가능해집니다. 그럴 때 4차원 세계의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와 지식을 공급받게 됩니다. 이것이 몸을 입고 영생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육체를 입고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영생을 살고, 직장에서도 영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어디에 있든지 삶에 필요한 지혜와 지식을 4차원에서 공급받으며 영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마주보는 시간은 영생의 시간이 되어야 하고, 밥을 먹는 시간도 영생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이 4차원과 연결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이단과 사이비와 신앙적 오류가 문제 되는 이유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을 빼앗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을 빼앗기면 육체를 벗고 살아갈 영생도 함께 빼앗기게 됩니다. 이것이 이단이나 사이비 혹은 신앙적 오류가 무서운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1장에 이어서 2장에서도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이단, 사이비, 신앙적 오류에 대해 방어막을 치는 이야기를 해나갑니다. 본문에서는 영생을 살 수 있는 자들에 대한 소속감을 말씀하시는데, 2절을 보면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도 바울과 대면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이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존재 자체가 살아서 영생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 자체가 영생의 증거였던 셈입니다. 여기서 위안으로 번역된 파라클레오(παρακαλω)옆으로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비록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지만 기도하고 편지를 써서 마치 옆으로 부르듯이 영생을 사는 데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자 하였습니다.

또 사랑 안에서 연합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사랑은 보편적 인류애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에서 붙박이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영적인 가족 의식이나 영적인 혈통 의식이나 영적인 종족 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마음의 의식이 붙잡고 영적인 유전자를 형성하면서 같은 영적 종족임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너희가 에바브라를 통해서 내가 전했던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영적인 동족이며 형제이고 가족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어지는 2절 하반부를 보면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을 위해서는 확실한 이해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확실한 이해의 풍성함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이 점점 더 확고해질 수 있고, 이단이나 사이비 혹은 신앙적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붙잡기 위한 확실한 이해는 아무에게나 전달되지 않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3절을 보면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전부이자 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일한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해 말합니다. 천국에 대해 말할 때도 변화산 사건을 통해 느끼게 되는 천국의 좋음은 아버지가 계심으로써 주어지는 상황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전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깨달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고 천국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하나님과 성령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이 아니기에 이 모든 일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의 의식은 늘 깨어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한 자아의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저를 예로 들자면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입니다. 또 목사입니다. 주어진 상황과 입장에 따라 자아의식은 변하게 됩니다. 범람하는 자아의식 속에서 유일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자아의식은 바로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자아의식이 십자가에서 죽고 오직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혜와 지식이 주어집니다.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이 없어도 아내 앞에서 필요한 모든 지혜와 지식이 주어지고, 아버지라는 자아의식이 없어도 자녀 앞에서 필요한 모든 지혜와 지식이 주어집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장이지만 나 자신은 과장이라는 자아의식에 대해서 죽습니다. 그런데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만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장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모든 힘과 지혜와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충되고 주어지고 허락됩니다.

지혜는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할 것이며,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없습니다. 과장이라는 자리, 남편이라는 자리, 아버지라는 자리, 목사라는 자리에 서 있을 때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해 죽은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의식은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로 가게 됩니다. 의식이 하늘을 향한 상태에서 무슨 행동을 해야 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기도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다만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신분 의식에 대해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늘로부터 모든 어떻게에 대한 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되는 영적인 사실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포함하여 인격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 바탕이 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계좌에 100만 원이 있다면 그 사실로부터 어떤 일에 돈을 쓰고 어떤 일에는 돈을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나옵니다. 이렇게 인격적인 모든 활동의 근간이 되는 사실들 중에는 영적인 사실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는 영적인 사실들을 만나게 됩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유일한 주체라는 사실, 천국의 사실, 성령님에 대한 사실과 같은 영적인 사실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알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늘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빛을 발할 때, 그 모습을 바라본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지고 맙니다. 천국의 좋음을 사실로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동시에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던 모든 일들이 배설물로 여겨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며 침 흘리는 일들이 실은 내 마음에 좋음으로 발탁되기에는 너무나 안 좋아서 배설물로 내쳐야 마땅한 사실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좋음도 세상의 좋지 않음도 모두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주어지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풍랑 만난 배에서 깊이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주권자이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사실들을 알게 될 때, 그 토대 위에서 몸이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변함없는 평강이 생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4차원 세계와 연결이 이루어지고 하늘로부터 지혜와 지식이 주어집니다. 3차원 세상에서의 어떻게라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4차원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마음의 환경과 토대를 이루면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육체를 갖고 영생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사는 것은 피조물인 천사들이 천국에서 영생을 사는 것과 똑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천사들은 천국에서 영생을 살지만 우리는 아직 몸이 살아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영생을 살아갑니다.

하늘 아버지와 주님과 성령님이 우리 육체의 감각에 가려져 계시기에 오직 믿음 안에서 영적인 사실들을 마음으로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사실들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작동합니다. 반대로 천사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직접 대면하기에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랑할 기회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좋음에 빠져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몰입되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육체 때문에 하나님과 차단되어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써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로 만나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 대신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좋음으로 선택하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이 더 우선적인 있음이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 가운데 그 하나님을 소망하고 사랑합니다. 이것은 천사들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천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어떤 대상보다 우선적인 있음으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어떤 피조물보다도 우선적이고 유일한 좋음으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 유일한 주체성임을 인정하는 믿음과 사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써 이 세상에서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 된 유전자를 보이는 것이야말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사는 동안 가정에서도 영생을 살고, 밥을 먹거나 길을 갈 때도 영생을 살고, 직장에서도 영생을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 육체로 사는 영생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에서 지혜와 지식의 말을 들을 때 교묘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밖에 머무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구원과 영생과 죄 사함을 언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기에 무슨 말을 하든지 다 거짓말입니다. 이들은 하늘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과 밖을 구분하는 기준은 죽은 자의 자아의식입니다. 나에게 설교를 하는 사람이, 내가 보고 있는 책을 쓴 사람이, 항상 의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진 자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머무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위치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면 그 말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면 반드시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을 빼앗기게 됩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을 빼앗김이 무서운 일인 이유는 육체를 벗고 살아갈 영생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영생 대신에 영멸과 영벌인 영원한 지옥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았다.’라는 일회성 고백은 영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예수님 안에 머무름이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지혜와 지식이 하늘로부터 조달됩니다. 이 세상에서 영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영생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는 점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집사람과 함께 강릉에서 조금 떨어진 동해 지역에 사시는 사모님 네 분을 만나 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사모님들끼리 모이셨다고 합니다. 목사님들도 그렇게 하시는 경우는 드문데 사모님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위해 모이셨다고 하니 무척 마음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랑의 연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분들의 모임이 바로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품고 있는 자들의 동족 의식으로 모이셨기 때문입니다.

이분들께서는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계셨습니다. 남편인 목사님께서 강단에 서실 때 십자가 생활화의 정수를 모른 채 설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께서는 답답함을 느끼셔서 남편과 싸우기도 하셨고 권유해보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목사님들이 십자가 생활화의 정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교리적이나 신학적인 지식이 해박하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수백 페이지를 넘나드는 신앙 서적을 섭렵했다고 하더라도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형제 앞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없다면 여전히 십자가를 모르는 상태입니다. 백 날, 천 날 이야기해봐야 십자가를 알 수 없습니다. 천 페이지, 만 페이지를 십자가에 대해 묘사하더라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상태입니다.

신학과 사상을 모르고 교리를 모르더라도 십자가 예수님은 삶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의식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환경에 대해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여전히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목사님이라고 해서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영생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이란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매 순간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유지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남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가면서,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교인들 틈에서 홀로 실천하고 계셨습니다. 사모님들끼리 모여서 서로 격려하며 어떻게 하든지 몸을 입고 사는 영생을 잃지 않으려고 애씀이 놀라웠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밖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은 육체를 벗고 신령한 몸을 입고 살아갈 영생의 마중물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벗을 때 맞이할 궁극적인 영생은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에 이어서만 올 수 있습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진 자들끼리 서로 위로하며 연합하여 함께 살 수 있는 생입니다. 아무쪼록 육체를 입고 사는 영생의 모습과 성격과 결이 날로 여러분의 삶에서 뚜렷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육체를 입고 영생을 살기 위하여 오늘도 우리의 의식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붙박이가 될 수 있도록 권유해주시고 일깨워주시고 독려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