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출장안마,출장마사지,바나나출장안마이미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돼지 믿음_태승철

by 태승철 · 23-10-21 09:21 · 441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돼지 믿음>의 줄거리 :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이 속담에 따르면 교회 속에서 준동하는 거짓 선생과 거짓 교훈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거짓 교인의 영적인 본질은 이 속담 속의 개와 돼지의 처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거짓 신앙에 사로잡힌 자들을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자들이라고 과격하게 정의합니다.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우는 사자 같은 마귀의 먹이가 된다는 뜻이지요.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돼지 믿음

 

(베드로후서 2:1~22)

 

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3.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후서 2장은 거짓 선생들과 그들의 교훈을 경계하라는 일관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1~3절을 통해 제시됩니다. 그리고 4~11절까지는 거짓 선생들과 이들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히 주어지리라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내용이 천사들에게 임한 심판, 노아 때에 임한 심판,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심판이 예로 등장합니다. 12~19절까지는 이들의 불의함이 언급되는데 17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짓 선생들과 거짓 가르침의 핵심을 드러내는 20~22절의 마지막 단락이 이어집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 시대에도 거짓 선생들이 누구이며 거짓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거짓 신앙의 본질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돼지 믿음이라는 제목은 과격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사도 베드로가 거짓 선생들과 거짓 교훈을 경계하며 직접 사용한 속담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심정을 그대로 담아내기 위하여 이와 같은 제목을 정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인정한다면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에 개돼지 믿음이 있습니다. 이 개돼지 믿음은 바로 거짓 선생들의 영적인 본질이며 거짓 선생들의 교훈을 따르는 거짓 교인들의 영적인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2장 전체는 거짓 선생들을 경계하라는 주제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선민의 역사에는 구약시대부터 언제나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신약시대의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외부의 박해가 아닌 내부에서 발생하는 거짓입니다.

예를 들어 교인 만 명 정도의 커다란 예배당 조직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예배당 조직의 강단을 책임지고 있는 목사가 진리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설교를 한다면 어떨까요? 부목사나 장로님 혹은 각 부서의 제직들이나 일반 교인들을 진리에서 벗어난 기준으로 지도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인들은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문제는 이단으로 규정되지 않은 정통교단의 예배당 강단에서도 얼마든지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는 진리의 도가 언급되고 21절에서는 의의 도가 언급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설교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물론 거짓 교훈과 거짓 신앙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에도 이러한 일은 있었고 거슬러 올라가 이사야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구약시대에도 이러한 일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짓 교훈과 거짓 신앙을 지지하는 세력은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거짓 선생들이란 이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이단을 교회 안에 끌어들이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단의 이름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보면 이단과 똑같은 교훈과 가르침을 교회 안에 들어와서 자행합니다. 이렇게 선생의 입장인 목사나 가르치는 자들이 진리의 기준을 벗어난 거짓 교훈으로 무장되어 있을 경우에는 일반 교인들로서는 대책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컸기 때문에 신약성경에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계가 계속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64~6절에서도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기까지 하였고, 내세의 능력까지 맛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의식 속에 천국을 켜놓지 못했습니다. 천국을 켜놓고 켜진 천국에 의해서 이 세상을 보면 내세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도 타락하였기에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디모데전서 119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양심이란 십자가 예수님을 의식 속에 켜놓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이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또한 바로 이러한 내용입니다. 20절을 보면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과 디모데전서의 말씀과 베드로후서의 말씀 중에, 믿음을 가졌고 온갖 하늘의 은사와 내세의 능력까지 맛본 사람이 믿음의 파선을 일으키는 이유를 베드로 사도가 본문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무엇 때문에 믿음의 파선이 일어나는가? 무엇 때문에 거짓 선생들이 생겨나는가? 왜 거짓 선생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게 되는가?’에 대한 이유를 가르쳐줍니다.

 

이러한 본문의 핵심이 20~23절입니다. 20절에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22절에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는 속담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짓 믿음을 알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느냐 아니냐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20절을 보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앎이란 앞서 켜있는 지식을 가리키는 에피그노시스(ἐπγνωσις)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부르고 생각할 때 이 점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 예수를 앎으로 마음에 켜놓고 있었기에 세상의 더러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 속에 켜놓으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흐름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는 길이 됩니다. 예수님을 의식 속에 켜놓는 것은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의식 속에 켜놓은 대상을 향하게 됩니다. 의식 속에 돈 문제를 켜놓으면 마음이 돈으로 흐르게 됩니다. 의식 속에 자녀 문제를 켜놓으면 마음이 자녀에게 흐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의식 속에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켜놓으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의식 속에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켜놓는 일이 중단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 마음은 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향하는 흐름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식 속에 켜놓게 되고 마음도 세상 것들을 향해 흐르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고 22절에서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식 속에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켜놓을 수 없다면 개돼지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개돼지 믿음도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입니다. 의식 속에 이 세상 것을 켜놓은 상태에서도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온갖 교리와 신앙고백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마음의 의식 속에 켜놓은 대상은 이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의식하지도 않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의 의식 속에 예배당 건축이라는 과제가 켜지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러한 목사님도 천국부터 시작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구원과 십자가 보혈에 대해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목사님의 의식 속에 켜져 있는 내용은 예배당 건축이기에 이분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거짓이 발생하는 옹달샘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쉽고도 명백하게 밝혀줍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믿은 뒤로 언제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의식에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는 마음의 흐름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유지되는 중에 성경도 읽어야 사사로이 해석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마음이 하늘로 흐르는 중에 이 세상 삶에 대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도 알려지게 됩니다. 그래야만 진리의 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이러한 진리의 도를 지키는 교인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은 많습니다. 입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갈 것이라 확신하며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생활 현장에서 의식 속에 켜놓고 있는 대상은 예수님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 마주하게 되는 하나님과 성령님과 천국도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일들을 의식에 켜놓는 에피그노시스의 상태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해 말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다 거짓입니다. 심지어 목사나 지도자가 이러한 상태라면 15절에서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라고 하였던 것처럼 교인들을 이용하는 악의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질문을 하나 해볼 수 있습니다. 몸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왜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야 할까요? 세상의 더러움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세상 자체는 더럽지 않습니다. 우리 때문에 공범이 되었을 뿐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내가 세상 것을 먹고 싶어 하지 않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듯이 내 마음이 세상 것에 빠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럽지 않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세상은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위한 경륜의 재료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마음으로 세상을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세상은 더러움이 되어버립니다.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이 배우자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잉꼬부부라고 칭찬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자체가 영적인 간음입니다. 배우자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태도 자체가 더러움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한다면 당연한 일이 아닌 더러움입니다. 직장에서 승진하여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한다면 그 또한 더러움입니다. 사람과 관계할 때든지 일을 할 때든지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과 만족을 표현할 대상으로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결코 세상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님이 예배당 건축을 해서 기쁘고 만족하고자 한다면 마음이 엄청나게 더러운 상태를 유지하는 중에 설교하게 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할지라도 마음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셈이고, 깨끗하게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셈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오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대상이 담긴 상태는 그 자체가 더러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라고 해서 자녀를 마음에 담았다가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정도는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비어있는 마음의 상태에서 첫 번째 대상으로만 만나집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을 수 있게 예수님께서 앞서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내 몸까지도 포함합니다. 몸이 있기에 가족들과 관계하고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내 몸을 포함한 이 세상에 대해 내 마음이 죽는 사건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라도 먼저 담는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로 올라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부모로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배우자의 아내나 남편으로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누나나 오빠나 동생으로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신분은 세상에 있는 상대방을 내 마음에 담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단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마음에 가족은 물론이고 목회 현장은 물론이고 교인들을 담고 있습니다. 심지어 마음에 나라와 민족까지도 담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설교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나오는 설교는 무조건 거짓이기에 참 답답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유명한 스타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스타 목사님들의 설교를 배우고자 경청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5분도 듣기 힘든 설교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아는 첼리스트가 한 분 계십니다. 이분은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공부하셨고, 우리나라의 웬만한 콩쿠르에서는 심사위원을 하십니다. 이분이 심사위원을 하실 때 보면 첫소리만 들어도 실력이 가늠된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의 설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잠깐만 들어도 이 목회자의 마음이 진리의 도와 의의 도를 벗어났는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의식 속에 이 세상을 켜놓고 있다면 세상이 가득히 담기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거짓 선생의 옹달샘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물 없는 샘이고, 광풍에 날아가는 안개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면 세상을 토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죄는 내 마음과의 관계에서는 거의 동격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로마서 6장의 말씀은 세상에 대한 죽음과 동일시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20절에서 죄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라고 하지 않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야고보서 44절에서도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됨은 죄 때문인데 야고보 장로는 이를 세상과 벗 됨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영적 거짓은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한 모든 교훈과 가르침을 이야기할지라도 그 마음과 의식의 차원에서 세상을 좋아하여 세상을 켜놓은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거짓 선생들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항상 대세를 이루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되겠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좋습니다. 태어나서 예수님 믿기까지 살아온 방식이 세상을 좋아하여 세상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좋아함은 너무나 익숙하고 편한 일입니다. 여전히 세상 것들을 갖고 싶고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립니다.

부모가 자녀를 볼 때 훌륭하게 커가는 것이 마음의 기쁨이 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훌륭함조차도 실은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남편을 봐도, 아내를 봐도, 형제자매를 봐도 전부 이 세상적인 가치와 연관 지어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짓 선생들이 나타납니다. 마음에서 세상 가치를 붙잡고 있는 상태를 묵인하거나 인정하거나 모르는 척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확실하게 전합니다. 그럴 때 이러한 가르침이 참 괜찮고 맛있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세상도 놓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도 믿을 수 있다니 좋게 여겨집니다. 그렇게 대세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돼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의 비유는 내 마음에 담고 싶고 먹고 싶어 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세상의 가치들을 갖고 싶어 하고 먹고 싶어 합니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의 말씀에서처럼 선한 양심이 있다면 이건 아니지.’라며 세상을 거부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넘어가면 이 발버둥을 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 가치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죽기 위하여 발버둥 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쉽게 되는 일이나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이것을 중단하게 만듭니다. 여기에는 절제도 없고 인내도 없습니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은 의미가 다소 다릅니다.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이 마음 안에 세상을 담는 것이라면,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에 마음이 던져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자 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내가 책임지고자 할 때 마음은 이 세상의 문제와 상황이라는 구덩이 속으로 던져집니다.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드려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책임지려는 생각이 들고 이 세상일에 대한 부담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발버둥 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동안에는 발버둥 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소망하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버립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세상일을 책임지려는 마음을 없애버립니다. 그렇게 해야만 진리의 도와 의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서 세상이 사라져야 된다.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사사로이 해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하는 설교를 들어보면 이와는 반대입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 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 자체가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상태이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상태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님 세 분을 꼽으라면 거의 일치된 의견이 나올 것입니다. 저 또한 그분들의 설교를 가끔 들어봅니다. 첫 마디에 우리에게 가정과 직장과 예배할 수 있는 교회와 이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예배를 시작합니다. 무엇이 마음에 가득 담겨있는지 너무나 잘 드러납니다. 술에 취하듯이 스타 목사로서 목회에 취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목회조차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세상에 취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벌떼같이 많은 교인들이 이러한 목사님들을 추종합니다.

 

우리가 추종할 수 있는 대상은 목사가 아닙니다. 진리의 도와 의의 도를 따른다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기 위하여 발버둥 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내 속에서 일어나는 죄적 체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과 벗 되면 하나님과 원수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는 죄적 체질은 마음으로 세상을 먹게 합니다. 책임을 지면서 세상이라는 웅덩이 속에 빠지게 합니다. 세상을 먹으며 더러워지고, 세상에 빠져서 더러움에 뒹구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입니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인 거짓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돼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쩌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들 속에 예외 없이 거짓이 준동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석으로 흙 속에서 쇳가루를 골라내듯이 하나님께서 거짓 선생들을 통하여 가짜들을 가려내시려는 역사인 줄 압니다. 그 거짓 선생들이 노리는 포인트를 정확히 이해하게 하셔서 진리의 도와 의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