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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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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내 삶의 중심축 어린 양 예수_태승철

by 태승철 · 23-12-28 09:46 · 372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과 내 삶의 중심축 어린 양 예수>의 줄거리 :

예수 믿기에 이렇게 돌아가고, 대충 믿거나 잘못 믿기에 요렇게 돌아가고 있으며, 전혀 안 믿기에 저렇게 돌아가는 중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든 요렇게 돌아가든 저렇게 돌아가든 세상과 내 삶은 어린 양 예수님이 중심축이 되셔서 돌아갑니다. 어린 양 예수님과 무관한 이 세상 역사는 없습니다. 삶을 바꾸고 싶고 인생을 제대로 궤도에 올려놓고 싶으면 중심축이신 어린 양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올바로 취하면 됩니다.

 

 

세상과 내 삶의 중심축 어린 양 예수

 

(요한계시록 5:1~7)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계시록 4장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보석 빛의 집합체처럼 묘사되었습니다. 5장에서는 천국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는 보석빛의 집합체로써 우리에게 궁극적인 좋음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좋음이 내 것이 될 수 있도록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경사스러움의 주인공이십니다. 이어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6절을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십사 장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핀셋으로 집어내듯이 선택하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감의 대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좋음의 대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이 세상을 향한 자기의 주체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주체성만을 인정한 승리자들로서 흰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십사 장로는 하나님께 선택받아서 하나님을 선택한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은 우리가 보좌 우편에 있음으로써 독생자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때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자는 하나님과, 아버지 아들의 관계로 맺어집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어린 양이 서 있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선택받아서 하나님을 선택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부자지간의 관계를 갖게 됩니다.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하여 이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표현해 보자면, 온 세상과 모든 인생이 이끌림을 받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삼아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이끌림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중국 일본 미국 아프리카의 나라들이나 인도 등 모든 나라들이 다 포함됩니다. 인도 같은 경우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무척 적습니다. 이렇듯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생활화하는 복음과 관계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종교적 차원에서도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도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끌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등지는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이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삼아 이렇게 돌아간다면, 예수님을 대충 믿거나 잘못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삼아 요렇게 돌아갑니다. 아예 예수님을 등지고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더라도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삼아 저렇게 돌아갈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삶이 이렇게 돌아가든, 요렇게 돌아가든, 저렇게 돌아가든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등질 수는 있지만 예수님이라는 중심축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중심축을 유지하는 효과가 있고, 중심축을 상실하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중심축과 무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중심축을 유지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효과가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중심축을 상실한다면 마찬가지로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받습니다. 그것이 삶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요렇게, 저렇게 사는 모습들이 다 이러한 기준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류 사회의 역사가 몇몇 강대국에 의해 주도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 단체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주동이 돼서 전쟁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도 하마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어린 양을 등지고 있지만 그들이 예수님과 상관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 중심축을 등지고 있는 상태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주도적으로 살던 인생의 여정을 중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로 인생을 본궤도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다면 먼저 예수님이 중심축이라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본궤도에 올려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일분일초의 모든 순간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두루마리가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 대해서만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나라에 대해, 지구의 모든 만물에 대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인생이 본궤도에 오른다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를 정해놓으시고 분초마다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인생을 본궤도에 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식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중심축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중심축을 놓치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내게 계획하신 모든 일들을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본궤도에 올라선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절을 보면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세계 전체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피조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미국에 살고 있고, 또 어떤 분은 호주에 살고 있으며, 유럽이나 아프리카 혹은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산지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모두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없다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로서 당신에 의해 있게 된 모든 것들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 두루마리에 대해 묘사하기를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두루마리는 펴서 읽는 사람만 볼 수 있게 안쪽에만 씁니다. 그런데 전 세계의 역사와 개인의 모든 역사에 대한 진행 과정이 예고되고 정해져 있는 이 두루마리가 안팎으로 쓰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 당시에 안팎으로 쓰인 두루마리가 종종 있기는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두루마리는 특별히 오피스토그래프(opisthograph)라고 불렸는데 통상적으로 인으로 봉하는 중요하고 공식적인 문서에 쓰이는 형식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두루마리가 비쌌기에 개인적 용도에서 사용할 때는 바깥쪽까지 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가 안팎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에는 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두루마리 안쪽에는 하나님이 기록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두루마리에는 태승철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다 기록되어 있으며, 여러분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루마리 바깥쪽에도 내용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것을 하나님이 보실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에 있는 인격체인 인간도 확인하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실현되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안팎으로 기록된 두루마리는 아버지 하나님이 안에 기록하신 내용들이 바깥에서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고 했는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인은 하나님의 일곱 개의 비밀스러운 주권적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두루마리에 일곱 개의 인이 되어있다면 그 내용을 보기 위해서 모든 인을 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인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일곱 개의 계획이 하나씩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을 뗀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기록하신 뜻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인을 뗄 사람을 찾을 필요 없이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대로 이루시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자 주권자로서 계획하셨지만, 그 계획의 실현은 누군가에게 의존되거나 누군가가 나서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참 중요한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 만물의 있음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라는 부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향한 뜻과 계획이 외부적인 강압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로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시고 육체를 입혀서 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지으신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좋아하여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 계획에 해당하는 당사자들이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인간이 좋고 나쁨을 분별하여 스스로 계획하고 뜻을 세움을 의미합니다. 본래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아들여 그대로 실행하는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두루마리와 일곱 인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전제로 모든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타락하였기에 천사가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라고 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3절을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에게도 감히 주권자의 계획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펼칠 수 있는 자격과 권능은 없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겪으시는 외로움이 표현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하나님은 보석빛의 집합체와 같은 궁극적인 좋음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러한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좋으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계획하신 사랑의 뜻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늘 위에 있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만, 땅을 향한 하나님의 뜻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할 뿐이지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좋아하며 그 뜻을 기쁨으로 환영하여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없었습니다. 두루마리는 쓰여 있는데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아들여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42~3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시편 532~3절에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기에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거점이 확보될 수 없습니다.

 

4절을 보면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계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상황이 너무나 참담하여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석빛의 집합체로 묘사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좋음이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택하신 분이고 내가 선택해야 하는 마땅한 분입니다. 예수님을 대하시듯 나를 아들로 대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가져서 누리며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 땅에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당신 자신까지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의 사소한 관심거리들에 밀리고 무시당하고 외면당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상황을 보며 하나님 아버지의 외로움에 공감하며 엉엉 울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는 눈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독교 종교인들까지도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그런 취급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에 마음이 가닿는다면 울 수밖에 없습니다.

5절을 보면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장로는 어린 양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기쁨의 소리인 복음인 이유는 아버지께서 내게 세상을 빠져나와 하늘로 오라!’고 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갈 수 있기에 복음입니다.

장로는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부르심을 들은 선택받은 자로서, 아버지만을 선택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간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덕분에 선택받고,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었음을 알고 있기에 사도 요한을 위로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는 이 세상이지만 오직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한 분만큼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룰 수 있는 분임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찾지 않을지라도 어린 양으로 묘사된 예수님 한 분만큼은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오직 아버지의 뜻만이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 위해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에 기록된 모든 뜻과 계획은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래봐야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일들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역사 속에서, 중심축이신 예수님을 등진 자가 그 나라의 지도자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좋을지 나쁠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중심축이신 어린 양 예수님과 무관한 역사는 없습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아프리카든 인도든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길거리에서 지나치는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어느 한 사람도 내가 지금 마음으로 바라보는 주님의 십자가와 무관하게 인생이 진행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온 세상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신 죽임 당한 어린 양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해서 돌아가는 역사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도 적용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를 바라보고 자녀를 바라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중심축을 등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중심축 상실의 효과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중심축을 붙잡고 살아간다면 중심축 유지의 효과가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지가 다를 뿐 중심축과 무관한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다시 5절을 보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셨기에 마음이 육체에 갇히는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음에는 육체가 소개하는 이 세상 것들이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면 마음에 돈 문제가 스며든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죽어도 두루마리에 기록된 돈 문제에 대한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원수가 마음에 스며들어서 미움이 생겼습니다. 자녀가 마음에 스며들어서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원수나 자녀에 대해 기록된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좋아하던 사람들도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원수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형편도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사셨으면서도 그 마음에는 이 세상의 상황과 대상들이 스며들지 않았기에, 두루마리에 기록되었던 아버지의 모든 뜻과 계획은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사자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어린 양과 사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은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좋아하셨습니다. 한편 사자는 이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존재감을 의식하는 마음, 좋음을 욕구하여 채우려는 마음, 주체성의 결정을 해야 되는 마음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세상이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승리를 이룬다면 사장님 앞에 서 있어도 사장님의 존재감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될 때 사장님을 향한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은 나를 통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몸이 사장님과 마주한다고 해서 마음에 사장님이 스며든다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6절을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일곱 뿔은 승리의 상징으로서 사자의 모습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완전히 이기셔서 사자의 권세를 갖게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곱 눈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이 일곱 눈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보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티벳의 스님들도 보고 계시고, 인도의 힌두교도들도 보고 계십니다. 세상에는 예수님과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들 인생과 자기들 나라의 중심축이신 예수님을 등지고 중심축 상실의 효과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지 중심축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온 세상에 예수님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본래의 창조적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중심축을 등진다면 본래 아름다운 창조적 뜻은 막히고 하나님의 주권은 그 막힘을 고려하여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예수님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사람과 나라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어린 양 예수님을 중심축으로 붙잡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의 눈길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올 때 막히는 자가 아닌 통과되는 자로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 안에는 내 인생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의 내용이 내 인생의 본궤도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이 중심축이심을 기억하며 의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중심축 상실 효과에서 벗어나서, 중심축 유지 효과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개인의 인생뿐 아니라 우리 가족 구성원의 인생과 나라와 민족과 온 세상천지 만물에 이르기까지 중심축이 되시는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다는 특권을 잠시도 보류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사용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내 인생 전체가 중심축 상실 효과를 벗어나 중심축 유지 효과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