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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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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의 모든 재앙 피하는 계시록 기도_태승철

by 태승철 · 24-01-13 09:31 ·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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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온 땅의 모든 재앙 피하는 계시록 기도>의 줄거리 :

어린 양이 일곱 번째 인을 떼자 이번에는 구체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대신에 일곱 나팔의 재앙이 등장합니다. 온 땅에 임할 재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재림 전까지 이 땅에서 살게 될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재앙입니다. 그러면 궁금합니다. 하나님이 그 이마에 인을 치셔서 흰옷을 입게 되고 종려 가지를 손에 들게 된 성도들은 이런 재앙의 와중에 어떤 상황을 맞이할까요? 그들은 독특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재앙이 스스로 비켜간다는 말씀입니다.

 

 

온 땅의 모든 재앙 피하는 계시록 기도

 

(요한계시록 8:1~6)

 

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2.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6.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계시록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기도를 보여줍니다. 이 기도는 온 땅에 임하게 되는 모든 재앙들이 스스로 나를 피해 갑니다. 마치 출애굽 때 열 가지 재앙이 온 애굽 땅에 임했지만, 선민 이스라엘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 땅에 임하는 재앙이 스스로 나를 피해 가는 기도가 본문을 통해 소개됩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할 때 이 땅에 임하는 어떤 재앙도 나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재앙에 대한 방수복을 입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재앙이라는 물이 스며들 수 없는 기름종이의 갑옷이 바로 계시록이 가르쳐주는 기도입니다.

 

본문에는 어린 양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의 마지막 일곱 번째 인을 떼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서 여섯 번째 인을 뗄 때마다 별도의 사건들이 독립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다만 일곱 번째 인에서는 독립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대신에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일곱 나팔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온 땅에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일곱 번째 인 안에 일곱 나팔이 들어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계시록을 이해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지침이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 직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언젠가 일어날 미래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금부터 70년 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재림 직전에 일어나는 일들이란 지금부터 60년 후부터 한 10년 동안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재림 직전은 이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써 시간 밖으로 나갑니다. 죽은 상태에서는 죽을 때의 의식 상태나 영적 상태가 그대로 유지된 채 1초도 흐르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시간 밖으로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 직전은 모든 사람이 죽기 전 상황입니다. 4,000년 전에 죽은 아브라함도 시간 밖으로 나가 1초도 흐르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잠에서 깨어나 죽을 때의 의식 상태와 영적 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예수님 재림 직전에 사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 시간 밖으로 나가 있다가 예수님 재림과 곧바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로부터 일곱 나팔의 재앙이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죽은 사람들에게도 일곱 나팔의 재앙은 임했으며, 지금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일곱 나팔의 재앙은 임하고 있으며, 앞으로 태어나 예수님 재림 때까지 살아갈 모든 사람들에게 일곱 나팔의 재앙은 임할 것입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이 일곱 나팔의 재앙에 앞서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서 세 번째 인까지 떼며 재앙이 임하는 모습을 보면 흰 말 탄 자, 붉은 말 탄 자, 검은 말 탄 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인을 뗄 때 육체의 죽음이 임하면서 청황색 말 탄 자에 의해 음부로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청황색 말을 탄 자에 앞서 세 명의 말 탄 자는 죽기 전에 세상에 등 돌리고 어린 양 예수께 돌아서라는 하나님의 바람이 담긴 채찍과 같은 재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다섯 번째 인과 여섯 번째 인을 뗌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가는 자와 음부로 들어가는 자가 결정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남은 것은 일곱 번째 인뿐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섯 번째 인과 일곱 번째 인 사이에 삽화처럼 들어간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7장에서는 이마에 인침 받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셀 수 없이 큰 무리를 이룬 성도와 교회의 모습이 묘사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든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대를 초월하여 전체로써의 교회를 이루는 일입니다. 흰옷은 개별적인 승리를 말합니다. 이 개별적인 승리는 종려나무 가지가 상징하는 대로, 임금이신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환영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내용이 언급된 뒤에 8장에서는 일곱 번째 인이 떼어지고 일곱 나팔의 재앙이 온 땅에 임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든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일까요? 본문은 어린 양의 승리를 받아들여 개별적으로 자기 삶의 승리를 이루는 사람들에게는, 온 땅에 임하는 일곱 나팔 재앙이 어떤 식으로 관계되는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든 자들은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시며 이마에 인을 치신 자들입니다. 이렇게 인침 받은 사람들은 어린 양의 십자가를 좋아합니다. 십자가를 좋아하기에 마음이 이 땅에 스며들지 않고, 또 이 땅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는 깨끗한 흰옷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일곱 나팔의 재앙이 임할 때 재앙이 피해 갑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이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일곱 나팔의 재앙이 온 땅에 임할 때 재앙이 이들을 피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인침을 받고, 어린 양의 십자가 승리를 받아들여 세상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 개별적 승리를 이룬 자들은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요?

본문 3절을 보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묘사가 다소 복잡합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계시록에 묘사되고 있는 보좌 주변의 상황을 공간적으로, 건축학적으로, 기하학적으로 질서정연하게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계시록은 해당되는 사안과 관계될 때마다 그때그때 성령 안에서 마음이 접하고 느끼게 되는 내용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측면에서 보좌 주변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시도입니다.

여기서 제단은 당연히 십자가 제단입니다. 이미 어린 양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어린 양의 피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단 곁에 천사가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지성소 바깥에 있는 성소의 분향단에서 향을 피울 때는 반드시 번제단의 불을 가져다 써야 했습니다. 번제단은 어린 양 상번제가 드려지는 곳입니다. 제단에서는 여러 가지 희생 제물들이 드려졌지만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드려지는 상번제는 항상 어린 양으로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이 상번제의 어린 양을 태워 죽이는 불로 향을 피웠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에 적용해 보자면 천사가 십자가 제단의 불을 가지고 향료를 태워서 향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58절을 보면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향기와 성도의 기도가 분리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성도가 드려야 할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향기와 성도의 기도가 분리되고 있는 그 내용을 따라 기도드릴 때 어제도 임했고, 오늘도 임했고, 내일도 임할 일곱 나팔의 재앙이 스스로 나를 피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를 내는 향료와 성도의 기도를 합하여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예물을 금제단에 올려놓으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번제단의 불로 향료를 태움으로써 나타나는 연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향료는 바로 죄와 저주에 찌든 나는 반드시 십자가 어린 양과 함께 죽어야 된다는 고백이 단호한 결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인격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를 볼 때 죄와 저주가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는 어린 양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결정을 합니다. 그러한 결정이 일어나는 나의 인격이 바로 향료입니다. 내가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자기 부인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나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자기 부인이 일어나는 나의 모습이 향료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부인이 일어나서 십자가에서 어린 양과 함께 죽는 것이 제단의 불로 태워짐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제단의 불로 태워져 죽은 내 마음의 향료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갑니다. 4절을 보면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향연, 다시 말해 향기로운 연기라는 것입니다. 이 향기로운 연기가 금제단에 올라가고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시는 예물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의 향료가 됩니다. ‘나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지금 하나님의 있음을 놓치고 있고, 하나님의 좋음을 열망하지도 않고 있다. 이러한 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라고 고백하는 마음이 향료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고 죽는 것이 향료를 태우는 것입니다. 향료를 태워서 죽게 되면 마음은 어린 양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늘로 올라온 마음을 금제단에 바쳐진 예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예물로 바쳐진 상태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있음을 느끼면서 존재감을 갖게 되고 좋음을 욕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늘로 올라간 성도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직면하여 하나님의 있음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욕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기도 외에는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기도는 달리 없습니다. 이 기도가 아니면 모두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하는 생각을 따른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부모가 자녀 걱정을 합니다. 부모의 마음에는 자녀의 존재가 있음으로 느껴지고, 자녀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깁니다. 이러한 상태는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아닌, 자녀의 있음과 좋음에 가서 닿은 상태입니다. 이것이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녀에게 마음이 붙어버린 죄와 저주 속에서 자녀가 이렇게 되면 좋겠고,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기도를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어떤 분을 만나서 대화를 했는데 결혼한 아들이 힘들게 일하고 들어와서 집안일까지 하는 걸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고 합니다. 걱정을 하든, 불쌍히 여기든, 어여삐 여기든, 귀엽게 여기든 우리 마음이 세상에 닿아서 생기는 느낌이라면 그것은 전부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갖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든, 사랑스럽게 여기든, 반대로 누군가를 싫어하든 걱정하든, 마음이 그것에 붙어있는 상태라면 모두 죄와 저주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한 마음 상태로는 무엇을 해도 죄악이고 무슨 기도를 해도 상달될 수 없는 거짓 기도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무조건 이 세상 것에 닿는 느낌 자체를 무서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귀엽게 여기든, 불쌍히 여기든, 걱정스럽게 여기든 무슨 느낌을 받든지 절대로 그냥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죄와 저주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편 이러한 이해를 통해 보자면 본문은 크게 오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땅에서 하는 기도가 대부분 원한에 맺힌 기도이기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불을 땅에 쏟듯이 재앙을 내리신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번제단의 불 중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기 몫의 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와 저주에 찌들었기 때문입니다. 멀쩡히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고 계신 두루마리에는 하다못해 오늘 내 머리카락이 몇 개 빠질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29~31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살면서,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는 정작 하나님의 있음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좋음도 욕구하지 못합니다. 배우자나 자녀의 있음이 먼저이고, 하는 일이 잘되면 좋겠고, 자녀들이 형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욕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 몫의 번제단의 불을 가져다가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태워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번제단에는 수많은 사람들 몫의 불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와 저주에 찌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죽어야 된다는 향료가 되지 못합니다. 또 그 향료를 태우기 위해 번제단의 불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나를 죽이는 일에 써야 할 불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렇게 쓰이지 못한 불들을 모아서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쏟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7절 이후에서 그 불이 일곱 가지 재앙으로 표현됩니다. 그 쏟아지는 불을 피하는 길은 내 몫에 해당하는 불을 나를 태워 죽이는 일에 다 써야 합니다. 이 불은 날마다, 순간마다, 장소마다, 사건마다, 문제마다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태워죽일 수 있는 불을 십자가 제단에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오늘 내 몫의 불을 나를 죽이는 일에 충분히 쓰지 않았다면 남은 불은 나를 향해 쏟아질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도의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형식을 갖춰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추구함이고 바람 그 자체입니다. 우리 마음의 바람과 소원과 욕구가 모두 기도에 포함됩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티를 내는 나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서 이러한 나는 반드시 어린 양의 십자가 제단에서 갈가리 찢겨 불에 타 죽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향료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제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는 다섯 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 한 분이 자녀 걱정을 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이 자녀가 30대 중반이 되었으니 이제 관심을 끊으라는 이야기를 자꾸 하시기에, 저는 자녀를 하나님 주권의 덩어리로 봐야 한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딱히 마음에 닿는 반응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 분은 자녀를 놓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고, 두 분은 자녀를 놓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자식을 놓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녀를 붙잡고 있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예전에 전국적으로 내려놓음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려놓음이 아닙니다. 내려놓음은 여전히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삶에 대한 방식으로써 내려놓음을 주체적으로 취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내가 붙잡고 있는 대상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붙잡고 있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향기로운 연기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한 채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람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곧 하나님 자신만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할 수 없다면 모조리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세상 것을 붙잡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기도 아닌 기도를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일이 바라는 대로 풀리는 것 같으면 응답을 받았다고 착각했습니다. 이것은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이 애초에 두루마리에 기록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계시록이 가르쳐주는 기도란, 우리 마음이 향료가 되어서 제단의 불로 태워져 연기처럼 올라가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향연이 될 수 없는 마음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의 기독교 종교인들이 이러한 진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세상 것을 쥐려고 하든지 세상 것을 내려놓으려 하든지 내가 주체가 되어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이렇게 주체가 된 내가 죽는 것입니다. 앞서 자녀로 고민하시는 분께 자녀를 하나님 주권의 덩어리로 봐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돈 문제가 생겼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에는 그 돈 문제와 관련된 앞으로의 진행 상황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돈 문제를 보고 느끼는 내가 죽어야 하는데 돈 문제를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내려놓는다는 말은 무섭고도 교묘한 말입니다. 마치 내가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여기지만 실제로는 주체가 되어서 내려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돈 문제에 대해 내려놓는 방식으로 관계하고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언어 하나가 이토록 중요합니다.

자녀를 하나님 주권의 덩어리로 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죽은 것이 아니라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제가 캐나다에서 살던 집에 벽난로가 있었습니다. 그 벽난로는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었는데 어느 날 아이가 그 유리에 손을 대고 화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내가 손을 대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자녀, , 건강, 미래를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름의 뜨거운 난로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에 내가 손을 댈 일이 아닙니다. 무조건 손을 떼야 합니다.

걱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버릇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라고 해서 자녀를 걱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미래를 걱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관계된 일인 한 하나님 앞에서 걱정하면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일에 대해서 내가 마음의 손을 대었기에 걱정도 생기고, 근심도 생기고,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생깁니다. 천지를 지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의 삶을 세상에 있게 하셨고, 두루마리에 기록하신 대로 이끌어 가시려고 하는데 내가 무엇을 붙잡을 수도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붙잡고자 하는 나는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향을 피워드리는 향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끊임없이 까먹는 나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 나의 인격 자체가 향료가 됩니다. 이 향료는 십자가 제단의 불로 태워야만 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어린 양의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금제단에서 아버지께 드려집니다. 그렇게 드려진 마음으로 간구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이렇게 향료가 되어 향기로 변신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향하는 기도를 드릴 때, 이 땅에 내려오는 모든 재앙은 저절로 나를 피해 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셨던 것처럼 내가 나를 채찍질하게 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포인트를 놓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 향료가 되게 하시며, 실제 삶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인정함으로써 향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해주시며, 하나님만을 향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는 기도를 통하여 온 땅에 임하는 열 가지 재앙이 스스로 피해 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